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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요한복음 14장 1~6절의 실질적 의미에 대하여

저는 아직 새내기 신학대학원생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었을지 늘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설교 - 주석들은 그런 면이 덜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설교의 오류는 이런 주석에서 비롯됩니다 - 는 그 말씀의 진정한 의도와는 동떨어져, 감상적이고 때로는 원래의 문맥과는 상관없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듣기에는 좋지만 그 안에 진실이 없는. 오늘 제가 전하려는 구절은 특히 거의 대부분이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의도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2.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John 14: 1 - 6)

 

요한복음 14장 1~6절의 통상적인 주석과 설교는 예수께서 천국에 그리스도인들의 방을 예비하신다는 것과 그러한 천국의 방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밝히셨다는 것이다. 이는 이 본문에 상당한 오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애석하게도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했던 착각과 비슷한 종류의 실수를 우리가 저지르고 있다. 이 단락은 13장 33절의 내용으로부터 이어지는데, 14장 전체는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와 동일한 이야기 속에 속해있고,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로까지 이어지므로, 우리는 이 전체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 본문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처럼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가시는 곳을 문자 그대로 오로지 장소 - 그게 물리적이든 다른 영적 차원의 장소이든 - 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성전에 대한 그러한 개념은 쉽게 교정되어 잘 받아들여진다. 다만 특정 서신서 본문을 읽을 때에나 일반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런데 이 본문에서 우리가 겪는 이해의 어려움은 상당히 커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극복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본문은 천국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에 대한 엄격한 정의가 아닌 대부분의 신자가 받아들이고 있는 그 천국이라는 의미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 본문은 결코 어떠한 장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천국을 어떠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해도 이 본문은 천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죽어서 가는 곳을 천국이라고 이해한다 해도 이 본문을 잘 읽으면 그러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그 천국이라는 개념조차도 잘못된 개념이라면?

 

이 본문은 13장 33~35절로부터 이어진다.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John 13: 33 - 35)

 

위 본문의 핵심이 33절에 있는가 아니라면 34~35절에 있는가. 당연 후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현대의 우리의 관심은 전자에 쏠려있다. 후자는 이해하기 쉽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궁금증에서 시작된 그 이야기가 사실은 후자와 관련되어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다. 14장의 첫 단락은 예수님의 계명과 깊은 관계가 있고, 14~15장은 정말로 성경에서 ‘사랑 장’이라고 불리어 마땅한 장이다. 

13장 33절에서 예수께서 어딘가로 가신다고 할 때, 제자들은 그곳을 이 땅의 어떤 물리적인 장소로 이해했다. 현대의 우리들은 보통 이곳을 ‘천국’으로 이해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바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신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과 사랑하라는 계명이 이어지는 패턴은 14장과 15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분명 이 두 가지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반복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4장 2절에서 예수께서 ‘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와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께서 가시는 곳을 어떠한 장소로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여기서 더 확실하게 그곳을 ‘천국’이라고 받아들인다. ‘아버지 집’은 당연히 하늘나라라고, 그곳에 우리의 거처를 준비해놓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3절에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를 떠올린다. 예수님은 분명 다시 오실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러한 재림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휴거라는 개념은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서 나온 것인데, 이 구절 역시 오독이다. 물론 여기에서 그 구절까지 살펴볼 수는 없지만, 휴거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도 없이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오셔서 데려가신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도 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오셔서 영접하시고 예수께서 계신 곳에 같이 있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예수께서 오셔서 데려가신다고 읽는다. 물론 그렇게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단 이 구절만 읽었을 때에만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14장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이 재림 때 오실 것이라는 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는 구절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거처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오셔서 거처를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자 그렇다면 2~3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곳이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의 방이라고 읽히는가? 3절에서 예수께서는 분명 오셔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셔서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18절에서 이해한 것처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제자들이 살아서 겪게 될 일을 말씀하신 것이고, 현대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14장 18절 말씀도 미리 한 번 보자. 예수께서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오시겠다고 하셨다. 만약 위 단락에서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을 말씀하시는 거였다면, 그분은 우리를 단지 세상 근심 속에 허우적대도록 놔뒀다가 마지막에 오셔서 천국을 데려갈 테니 잘 참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인가? 아니다. 제자들이 그 근심 속에 매몰되지 않도록 오셔서 함께 계시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고아로 버려두고 아이가 다 컸을 때 와서 좋은 집 하나 주는 것이 그 고아에게 힘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은 어디를 말하는가?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이라고 표현하신 유일한 경우는 바로 ‘성전’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제자들에게 성전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장소였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성전의 개념은 물리적인 대상에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익숙하다. 바로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새로워진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새로워진 성전 되심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 이후 구절부터 계속 말씀하신 것이다. 

2절에서 ‘거할 곳(μονή)’이라는 표현을 보자.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대저택’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한글성경번역본처럼 14장에서 ‘거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인 ‘μένω'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것이 중요하다. 즉 14장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거하다’라는 말씀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4절에서 예수께서는 ‘길’에 대해 말씀하신다. 1~3절까지를 우리가 죽어서 간다고 생각하는 장소 개념으로서의 천국으로 이해하면 4절의 길은 천국을 가는 길, 즉 천국 가는 방법이나 매체로 이해되어 버린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이 길도 여전히 의문 속에 있음을 5절에 도마의 질문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제자들처럼 현대의 제자들도 여전히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마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구절이 방금 말한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가 천국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 구절이 우리가 천국 가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대부분의  주석들은 이 구절을 단순히 그런 의미로는 보지 않고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 계시하고 계신 것으로 보고 있음에도, ‘길’이라는 표현에는 은연중 일반 대중들의 기대에 호응하고 있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자신을 계시하신 것으로 보는 주석들 또한 이 구절을 따로 떼어 보고, 이 구절의 앞뒤와의 상관관계를 보고 있지 못한 듯하다. 여기서 예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이다. 거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되심. 그 후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의 하나 됨까지로 확장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거할 곳의 의미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시고 - 이것은 실제로 그분이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의도임에 분명하다 - 그분을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바로 새로운 성전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야만 한다. 옛 성전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듯,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것이 예수께서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신 의미이다. 7~9절이 말씀하시는 바 예수를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17장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기도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길’이시면서 또한 그분이 생명이시다.

이렇듯 14장 6절의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천국 가는 방법으로서의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가 되는 방법을 제시하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14장의 1절에서 예수께서 어떤 말씀으로 이 장을 시작하셨는지 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지금 15장까지 길게 하시는 말씀은 바로 1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이다. 예수께서 떠나신 후 크게 동요하고 흔들리게 될 제자들을 격려하시기 위한 의도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며, 더 나아가 그들이 무엇인가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해 나가는 것, 바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15장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는 바로 14장과 동일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14장의 초반부를 잘못 이해했을 경우 15장 역시 잘못 이해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