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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복음에 관하여

 모 교단 직영 신학교에서 종교개혁에 관한 수업을 하던 중, 한 교수님이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질문을 하였다. 그때 목사님을 아들로 둔 한 권사님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답하셨다. "우리 죄가 용서받아서 천국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주일 후 다른 신학대학원의 수업시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천국 가는 길을 전하는 것.' 

 성경을 진지하게 읽었거나 신학 서적을 좀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위의 대답이 결코 좋은 성적을 보장해 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다 알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신도들에게 - 신대원 수업시간에는 수업이 진행되며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균형잡힌 정의가 제시되었다 -  복음의 의미에 대하여 물어본다면 거의 대부분 위와 비슷한 대답을 할 것이다. 정말 천국 가는 것이 복음의 의미일까?

 복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작은 책 한 권의 분량만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주 간략한 개요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복음의 의미에 다룰 때는 협의의 복음과 광의의 복음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먼저 복음 - 이 단어는 전문용어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 의 의미가 정말로 무엇이냐를 딱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말한다면, '예수께서 메시아이시고,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들에서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함께 혹은 이를 대신해서 사용하는 표현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후자의 진술을 할 때 사도의 의도는 바로 전자의 증거로서, 그러면서 결국은 전자와 후자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순수하게 복음을 전할 때, 그가 초지일관 선포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메시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고 부활한 이가 이 세상의 진정한 주(왕, 황제)이다'라는 메시지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유대인들에게는 가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에는 능력이 있어, 이 메시지를 듣고 믿는 은혜를 누리는 이들이 있었다. 여기까지가 복음의 좁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 아니던가? 그런데 예수께서 '메시아이자 주'라는 사실이 크게 기쁨으로 와 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기쁜 소식 아니던가? 위에서 잠시 말했듯이 우리는 복음이란 단어를 어느 정도 전문용어로 인식을 해야 한다. 복음이란 한자어를 각각의 글자로 분해한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물론 복음은 기쁜 소식이 맞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의 실제 의미를 오해하게 되는데 그러한 문자적 의미도 한몫했다고 본다. 복음의 헬라어 단어 'εὐαγγέλιον(유앙겔리온)'을  분해하면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긴 하지만, 사실상 어떤 특정 소식을 의미하는 일종의 전문용어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소식이다. εὐαγγέλιον 이 가지는 원래의 의미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와 잘 어울린다. εὐαγγέλιον에는 죽어서 천국가는 것에 관한 의미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넓은 차원에서 복음이 - 복음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서 말한 핵심적인 복음의 메시지에서 전하는 그 사건,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진정한 메시아이자 세상의 주가 되셨다는 것을 그 정점으로 삼는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아, 천국 가는 것은 바로 복음이 가지는 넓은 의미에 포함되는 것이구나'라고 속단할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그러한 복음의 의미에 결코 포함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 즉 예수님의 왕의로서의 등극 - 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이어지는 오랜 역사에서의 정점이 되는 사건이다. 그것은 바로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선한 목적 - 나는 이것이 사도 바울의 로마서8장과 빌립보서 1장,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선'과 '선한 일'이 의미하는 실질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 을 이루는 데 있어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 - 특히 이스라엘을 대표로 - 들로 인한 문제와 이 문제를 해결하실 것임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일련의 역사의 절정에 있는 사건이다. 온 우주의 역사가 문제 속으로 빠져들 때 그에 대한 궁극의 해결책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자 세상의 주로 등극한 그 사건이다. 이제 복음은 과거에 대한 해결책이었으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 된다. 이 비전은 두 가지를 내포한다. 하나는 그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하는 그 사건으로 인해 달라진 세상, 그리고 그 달라진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들. 복음 사건으로 인해 무엇이 달라졌는가. 간단하게 말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 나라가 있으므로 그 나라의 왕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복음을 말씀하실 때 자신이 메시아됨을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지 않으셨지만,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의 왕이 하나님을 자신 안에서 계시하고 있는 바로 자신임을 밝히셨다 -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많이 익숙한 이야기인가? 그게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제자들이 마땅히 이루어지기를 간구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민족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복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무엇인가? 이는 예수께서 여러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고 - 그 비 유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는데 이 비유는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과 약간 다르게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 요한복음에서의 고별 강화를 통해,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그 나라 백성에 합당한 거룩한 삶.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죄 사함받고 천국 가는 것 - 이는 죄사함과 천국 간다는 말의 정의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면 틀린 말이 절대 아니다 - 이 복음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무래도, 그게 우리에게 더 얻을 것이 많고 좋은 소식으로 들리기 때문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음이 가지고 있는 위험은 진짜 복음, 즉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 완수해야 하는 전제조건으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이다. 즉 천국 가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릿속으로 그러한 것들을 믿어버림으로 천국행을 보장받는다고 믿는 경우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심하게 주객이 전도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손님은 가짜 손님이다. 그냥 손님이 주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가짜 손님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꼴이다.